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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 같은 함포, 다른 선택

조선과 일본은 같은 함포를 마주했다 — 왜 한쪽만 8년 만에 체제를 바꿨나

1876년 강화도조약을 강요한 나라는, 22년 전 자신이 똑같은 방식으로 개항을 강요당한 나라였다. 배운 쪽이 그대로 써먹기까지 걸린 시간이 22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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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와 세계사를 두 줄로 나란히 놓은 비교 연표 그래픽. 1853년 페리 내항, 일본 개항 압력, 1866년 병인양요, 1868년 메이지 유신 등의 연도를 짚는다.
이 글이 짚는 연도를 한국사·세계사 두 줄에 나란히 놓은 그림. 본문에 나오는 사건만 표시했습니다.

연표에서 1853년과 1876년은 스물세 해 떨어져 있다. 앞의 것은 페리의 함대가 우라가 앞바다에 나타난 해이고, 뒤의 것은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이 강화도조약을 맺은 해다. 두 사건의 형식은 거의 같다. 군함이 항구 앞에 서고, 통상을 요구하고, 불평등한 조약이 맺어진다. 다른 것은 그 사이에 각 나라가 무엇을 했는가다.

같은 압력이 먼저 일본에 닿았다

1853년 매슈 페리가 이끈 미국 동인도함대가 에도만에 들어왔다. 이듬해 미일화친조약, 1858년에는 영사재판권과 협정관세를 포함한 미일수호통상조약이 이어졌다. 일본은 이 조약들을 불평등조약으로 인식했고, 그 인식 자체가 이후 수십 년간 일본 정치의 동력이 되었다. 개국의 책임을 물어 막부를 공격하는 존왕양이 운동이 일어났고, 사쓰마와 조슈가 그 중심에 섰다.

결정적인 것은 이들이 실제로 서양과 싸워 보고 결론을 바꿨다는 점이다. 1863년 사쓰에이 전쟁에서 사쓰마는 영국 함대에, 1864년 시모노세키 포격에서 조슈는 4개국 연합함대에 각각 크게 졌다. 양이(攘夷), 곧 오랑캐를 몰아내자는 구호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한 뒤 이들은 방향을 틀었다. 서양을 몰아내는 대신 서양처럼 되어 조약을 고치자는 쪽으로. 1866년 삿초 동맹, 1867년 대정봉환, 1868년 왕정복고와 메이지 유신이 3년 안에 이어진다.

메이지 정부의 초기 정책 목록은 이 전환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 준다. 1869년 판적봉환과 1871년 폐번치현으로 봉건적 지방 권력을 해체하고, 1872년 학제와 1873년 징병령·지조개정으로 국민·군대·재정을 새로 짰다. 1871년에는 이와쿠라 사절단을 구미에 보내 조약 개정을 타진하면서 제도를 직접 관찰하게 했다. 개정 교섭 자체는 실패했지만, 사절단이 가져온 것은 무엇을 베껴야 하는지에 대한 목록이었다.

조선에 닿은 같은 압력, 다른 결론

조선에도 같은 종류의 접촉이 있었다. 1866년 병인양요에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했다가 물러났고, 1871년 신미양요에서 미국 함대가 광성보를 함락했다가 역시 물러났다. 결과만 보면 조선은 두 번 다 버텨 냈다. 흥선대원군이 전국에 척화비를 세운 것은 그 경험에 대한 해석이었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여기서 일본과의 차이가 갈린다. 일본의 사쓰마·조슈는 지고 나서 결론을 바꿨고, 조선은 물러가게 만든 뒤 기존 결론을 강화했다. 두 함대가 물러난 것은 사실 조선을 점령할 의도나 병력이 애초에 없었기 때문이지만, 당시로서는 방어의 성공으로 읽을 근거가 충분했다. 잘못된 교훈이 아니라 제한된 경험에서 나온 합리적 결론이었고, 바로 그래서 고치기 어려웠다.

조선 안에도 다른 목소리가 없지는 않았다. 이미 18세기 후반부터 박지원·박제가 같은 북학파는 청의 기술과 상업을 배우자고 주장했고, 개항 직전에는 박규수가 대원군의 척화 노선에 반대해 문호를 여는 쪽을 설득하려 했다. 다만 이 흐름은 소수 지식인의 논의였고 정책을 뒤집을 만한 세력 기반을 갖추지 못했다. 일본의 사쓰마·조슈가 번의 재정과 병력을 쥔 채 노선을 바꿨던 것과 달리, 조선의 개화론자에게는 자기 결론을 실행에 옮길 물리적 수단이 없었다.

구조적 조건도 달랐다. 일본의 막번 체제에서는 사쓰마·조슈 같은 유력 번이 독자적으로 서양과 접촉하고 무기를 사들이고 유학생을 보낼 수 있었다. 중앙이 통제하지 못하는 여러 개의 창구가 있었던 셈이다. 조선은 중앙집권적 관료제가 정보와 대외 접촉을 일원적으로 관리했다. 안정된 체제에서는 장점인 구조가, 외부 충격에 대한 실험의 수를 줄이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1875년 운요호, 그리고 배운 대로

1875년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 앞바다에 접근해 조선군의 포격을 유도하고 이를 구실로 영종도를 공격했다. 이듬해 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이 맺어진다. 조약문은 조선을 "자주국"이라 규정해 청의 종주권을 부인했고, 부산 외 두 항구의 개항, 일본의 해안 측량권, 그리고 영사재판권을 담았다. 협정관세로 관세 자주권도 제약됐다.

이 조항들의 출처는 분명하다. 1858년 일본이 미국에게서 받은 조약의 핵심 항목과 거의 같다. 페리의 방식과 조항을 그대로 옮겨 쓴 것이다. 불평등조약의 피해자가 22년 만에 가해자가 되는 경로가 연표 위에 그대로 남아 있다.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조약 체제는 서양에서 한 번 만들어진 뒤, 그것을 먼저 받은 나라가 이웃에게 다시 부과하는 방식으로 확산됐다.

개항 이후 조선도 빠르게 움직였다. 1880년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1881년 조사시찰단을 일본에, 영선사를 청에 보냈으며 별기군을 창설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으로 서양 국가와 처음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이 잇달아 개화 추진 세력을 꺾었고, 두 사건 모두 청과 일본의 군사 개입을 불러 조선의 정책 결정 공간 자체를 좁혔다. 일본이 유신 이후 20년간 외부 개입 없이 내부 개혁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과 대비되는 지점이다.

8년이 아니라 조건의 차이

1868년과 1876년의 간격을 "조선이 8년 늦었다"로 요약하면 중요한 것을 놓친다. 일본의 유신은 개항 15년 뒤에 왔고, 그 15년은 내전에 가까운 정치 투쟁과 두 차례의 실전 패배로 채워져 있었다. 조선의 1876년은 그 15년에 해당하는 과정 없이 조약부터 맞은 해다. 순서가 달랐다. 일본은 맞고 → 싸워 보고 → 바꾸고 → 다시 맞섰고, 조선은 막아 내고 → 강화하고 → 결국 맞았다.

더 결정적인 차이는 시간의 여유였다. 일본이 개항한 1850년대 서양 열강은 크림 전쟁, 세포이 항쟁, 남북 전쟁, 그리고 태평천국 이후의 중국에 힘을 쏟고 있었다. 조선이 개항한 1870~80년대는 제국주의 경쟁이 본격화된 시기다. 1884년 베를린 회의로 아프리카 분할이 논의되고, 동아시아에서는 청·일·러가 직접 부딪치기 시작한다. 같은 개혁을 하더라도 주어진 시간이 달랐다.

그래서 이 비교의 결론은 "누가 더 현명했나"가 아니다. 같은 압력이라도 어떤 경험을 통해 그것을 해석했는지, 실험할 수 있는 창구가 몇 개였는지, 남은 시간이 얼마였는지에 따라 결과가 갈렸다는 것이다. 연표에서 1868년과 1876년을 나란히 놓으면, 두 해 사이의 여덟 칸이 아니라 그 앞뒤로 뻗은 조건들이 보인다.

한눈에 보기

연도한국사세계사
1853년페리 내항, 일본 개항 압력
1866년병인양요
1868년메이지 유신
1871년신미양요·척화비이와쿠라 사절단 파견
1875년운요호 사건
1876년강화도조약
1882년임오군란·조미수호통상조약
1884년갑신정변베를린 회의

이어서 읽기

참고 자료

사실 관계는 위 자료를 따르며, 비교와 해석은 이 사이트의 것입니다.

이 시대의 다른 사건들도 연표에서 직접 비교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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