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 동학농민운동과 제국주의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1894년,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각축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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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은 조선 근대사의 분수령이다. 안으로는 농민들이 반봉건·반외세를 외치며 봉기했고, 밖으로는 조선의 지배권을 두고 청과 일본이 전쟁을 벌였다. 이 두 사건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구 제국주의가 동아시아를 잠식해 가던 큰 흐름 속에서 함께 얽혀 있었다.
안에서 터진 불만, 밖에서 몰려온 압박
이미 1882년 임오군란에서 신식 군대와의 차별에 반발한 구식 군인들의 봉기가 청군의 개입으로 진압되며 청의 내정간섭이 강화된 바 있었다. 그로부터 12년 뒤인 1894년,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동학농민군이 지방관의 수탈에 맞서 봉기했다(동학농민운동). 농민군은 전주성까지 점령하는 기세를 보였지만, 이를 진압하겠다며 조선 정부가 청에 파병을 요청하자 일본도 톈진조약을 근거로 군대를 보내며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결국 농민군은 정부와 화약을 맺고 해산했지만, 이미 조선 땅에 들어온 청·일 양국 군대는 물러가지 않았다.
같은 해, 조선의 지배권을 둘러싼 청일전쟁이 벌어졌다. 결과는 신흥 강국 일본의 승리였다. 이 전쟁으로 청은 동아시아의 전통적 종주국 지위를 잃었고, 일본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급속히 확대하는 계기가 됐다. 전쟁 중이던 조선 정부는 일본의 압력 속에서도 신분제 폐지, 과거제 폐지 같은 근대적 개혁(갑오개혁)을 추진했는데, 이는 자주적 개혁과 외세 개입이 뒤섞인 조선 근대화의 복잡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더 큰 그림, 제국주의 시대의 동아시아
1894년의 격변은 갑자기 튀어나온 사건이 아니다. 이미 1840~1842년 아편전쟁에서 청이 영국에 패해 문호를 강제로 연 이후, 동아시아는 서구 열강의 압박에 서서히 노출되고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던 유럽 제국들이 아프리카와 아시아 곳곳을 식민지로 삼던 이 시기, 동아시아 삼국(청· 일본·조선)은 각자 다른 속도로 이 파고에 대응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1868)으로 발 빠르게 근대화해 오히려 제국주의 열강의 대열에 합류했고, 청은 거대한 몸집에 걸맞지 않게 개혁이 더뎠으며, 조선은 그 사이에서 자주적 근대화의 기회를 좀처럼 잡지 못했다.
청일전쟁 이후 조선을 둘러싼 각축은 끝나지 않았다. 1904~1905년에는 만주와 한반도의 이권을 놓고 이번엔 러시아와 일본이 러일전쟁을 벌였고, 여기서도 일본이 승리하며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를 결정적으로 강화했다(을사조약, 1905).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에서 시작된 격변은 결국 1910년 국권 피탈로 이어지는 긴 내리막의 첫 장이었던 셈이다.
이 비교가 말해주는 것
1894년의 한반도를 세계사 속에 놓고 보면, 이 해는 단순한 국내 소요가 아니라 제국주의 시대 약소국이 겪은 전형적인 경로를 보여준다. 내부의 개혁 요구가 외세 개입의 빌미가 되고, 열강끼리의 전쟁터가 되어버린 조선의 처지는 비슷한 시기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이 겪은 식민화 과정과도 겹쳐진다. 동학농민운동이 오늘날까지 각별하게 기억되는 이유는, 그 절박한 개혁 요구가 결국 국권 상실이라는 결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동학농민운동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신분제 폐지와 조세 개혁을 요구한 그 지향은 같은 해 갑오개혁에 상당 부분 반영됐다는 점에서 완전한 실패로만 보기는 어렵다. 오늘날 동학농민운동은 외세에 맞선 저항이자 아래로부터의 근대화 요구라는 두 얼굴을 지닌 사건으로 재평가받는다. 전봉준이 형장에서 남긴 마지막 말은 지금도 이 운동이 품었던 절박함을 전한다.
동학농민운동을 이끈 동학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을 내세워 신분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존엄하다고 가르쳤다. 이 평등사상이 지친 농민들을 하나로 묶는 힘이 됐다는 점에서, 이 운동은 종교적 신념과 사회 개혁 요구가 결합한 드문 사례로도 꼽힌다.
봉기가 전쟁을 부른 장치
농민들이 고부에서 봉기하자 왜 곧바로 청과 일본의 군대가 들어왔을까. 우연이 아니라 장치가 미리 깔려 있었다. 1885년 청과 일본은 갑신정변의 뒤처리로 톈진조약을 맺으면서, 조선에 군대를 보낼 때 서로에게 미리 알린다는 조항을 넣었다. 실질적으로는 한쪽이 파병하면 다른 쪽도 파병한다는 뜻이었다. 조선의 내부 소요가 곧바로 두 외국 군대를 동시에 불러들이는 자동 스위치가 된 것이다.
결정적인 것은 이 조약을 조선이 맺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조선의 영토에 군대가 들어오는 조건을 제3자끼리 합의해 둔 상태였고, 조선 정부가 청에 파병을 요청한 순간 일본군의 상륙은 조선의 의사와 무관하게 확정됐다. 그래서 1894년의 비극은 농민들이 봉기했기 때문이 아니라, 봉기가 일어나면 전쟁이 시작되도록 이미 설계돼 있었기 때문에 벌어졌다. 주권의 상실은 1910년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그 25년 전부터 조항 단위로 진행된 과정이었다. 조약문 한 줄이 훗날 군대의 상륙으로 바뀌는 데에는 9년이면 충분했다.
같은 개혁, 누가 집행하느냐
더 씁쓸한 것은 그다음이다. 갑오개혁(1894)은 신분제 폐지, 과거제 폐지, 조세 금납화 등 동학 농민군이 요구한 내용을 상당 부분 담고 있었다. 내용만 놓고 보면 아래로부터의 요구가 위에서 받아들여진 셈이다. 그런데 이 개혁은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의 감독 아래 추진됐고, 바로 그 이유로 정통성을 잃었다. 농민군이 2차 봉기에서 겨눈 상대가 조선 정부가 아니라 일본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압축해 보여준다.
같은 시기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갈린 지점이 여기다. 메이지의 개혁도 위로부터의 급진적 개혁이었지만 집행 주체가 내부 세력이었다. 반면 조선에서는 옳은 내용의 개혁이 외국 군대의 손에 실려 들어왔고, 그래서 개혁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굴복을 받아들이는 일이 돼버렸다. 농민군이 요구한 것을 조정이 문서로 승인했는데도 농민군이 다시 무기를 든 장면만큼 이 역설을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개혁의 정당성은 내용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누가 그것을 집행하는가가 절반을 차지하며, 1894년의 조선은 그 절반을 잃은 상태에서 나머지 절반을 받아야 했다.
한눈에 보기
| 연도 | 한국사 | 세계사 |
|---|---|---|
| 1840~1842년 | — | 아편전쟁 (청, 서구에 문호 개방) |
| 1882년 | 임오군란 | — |
| 1894년 |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 청일전쟁 |
| 1904~1905년 | — | 러일전쟁 |
| 1905년 | 을사조약 | — |
이어서 읽기
참고 자료
- 「무장포고문」·「폐정개혁 12개조」 — 동학농민군의 요구 원문
- 톈진조약(1885) 조문 — 청·일 파병 상호 통보 조항
- 『고종실록』 — 갑오개혁 의안과 청·일 파병 관련 기사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청일전쟁 항목
사실 관계는 위 자료를 따르며, 비교와 해석은 이 사이트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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