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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 조선과 에도 막부

전쟁 뒤 200년의 평화는 어떻게 유지됐나 — 통신사와 베스트팔렌

7년을 싸운 두 나라가 그 뒤 260년간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 통신사는 그 평화의 원인이었을까, 결과였을까.

발행 2026-08-02

임진왜란은 1598년에 끝났다. 그리고 조선과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까지 약 270년간 한 번도 전쟁하지 않았다. 7년간 국토를 짓밟은 상대와 이렇게 오래 평화를 유지한 사례는 흔치 않다. 같은 시기 유럽은 30년 전쟁(1618~1648)을 치른 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새 질서를 세웠지만, 그 뒤로도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무엇이 달랐을까.

화해는 위조된 국서로 시작됐다

통신사 이야기는 미담으로 소비되기 쉽지만, 출발은 꽤 지저분하다. 전쟁이 끝난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과의 관계 회복을 원했다. 그는 이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세력을 제거하고 집권한 처지였고, 조선과의 국교 회복은 새 정권의 정통성을 보여주는 카드였다.

문제는 조선의 조건이었다. 조선은 먼저 일본 국왕 명의의 사죄 국서와 왕릉을 파헤친 범인의 인도를 요구했다. 실제로는 대마도의 소(宗)씨가 국서를 위조하고 범인을 조작해 양쪽을 중개했다. 이 사실은 훗날 1633년 야나가와 잇켄으로 폭로되지만, 막부는 소씨를 처벌하면서도 관계 자체는 유지했다. 양쪽 모두 관계 회복이 필요했기에 위조까지 감수한 것이다. 1607년 첫 사절이 파견되고, 1811년까지 열두 차례의 통신사가 이어진다.

통신사는 평화의 원인인가 결과인가

통신사 한 행렬은 400~500명 규모였고, 부산에서 에도까지 왕복에 6개월에서 1년이 걸렸다. 막대한 비용은 대부분 일본이 부담했다. 왜 그런 부담을 감수했을까. 답은 국내 정치에 있다. 막부는 조선 사절의 화려한 행렬을 다이묘와 백성에게 보여주는 권위의 무대로 삼았다. 외국 사절이 쇼군에게 예를 표하는 광경은 막부 체제의 정당성을 시각적으로 증명했다.

조선의 계산도 분명했다. 통신사는 일본의 재침 의도를 확인하는 정보 활동이기도 했다. 사절단은 오가는 길에 일본의 정세와 군비를 관찰해 보고했다. 즉 통신사는 우호의 표현이기 이전에 양쪽이 각자의 필요 때문에 유지한 제도였다. 그렇다면 평화의 원인은 통신사가 아니다. 통신사는 평화가 양쪽에 이익이었다는 사실의 결과이자 그 이익을 확인하는 장치였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평화를 떠받친 진짜 조건

더 근본적인 조건은 따로 있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전쟁을 할 수 없는 구조를 스스로 만들었다. 다이묘의 처자를 에도에 두고 1년씩 번갈아 거주하게 한 참근교대는 다이묘의 재정을 소모시켜 반란과 원정 능력을 동시에 없앴다. 여기에 해외 도항 금지와 대형 선박 건조 제한이 더해졌다. 요컨대 일본은 대외 원정을 벌일 수단 자체를 폐기했고, 그것은 조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막부 자신의 안정을 위해서였다. 조선이 얻은 260년의 평화는 상당 부분 일본 국내 정치의 부산물이었던 셈이다. 조선 역시 임진왜란 이후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산성을 정비했지만, 그 방향은 어디까지나 방어였다. 양쪽 모두 상대를 칠 의사도 능력도 없는 상태가 오래 유지됐다.

같은 시기 유럽의 베스트팔렌 체제는 정반대 방향으로 작동했다. 1648년의 합의는 각 주권 국가가 스스로 무장하고 동맹을 맺을 권리를 인정하는 것으로 평화를 설계했다. 힘의 균형이 깨지지 않는 한 평화가 유지된다는 원리였다. 그래서 균형이 흔들릴 때마다 전쟁이 재발했다. 동아시아는 무장 능력을 줄여 평화를 얻었고, 유럽은 무장을 인정하고 균형을 관리해 평화를 관리했다. 전자는 오래 갔지만 변화에 대응할 힘도 함께 줄었고, 후자는 자주 깨졌지만 근대 국제법과 외교 제도를 낳았다.

260년 동안 실제로 오간 것

통신사가 열두 번뿐이었다는 사실은 오해를 부른다. 두 나라의 실제 접촉면은 사절단이 아니라 부산의 왜관이었다. 대마도 사람들이 상주하며 무역과 실무 교섭을 처리한 이 공간은 10만 평 규모에 수백 명이 머물던 상설 창구였다. 조선은 인삼과 쌀·면포를 내보내고 일본의 은과 구리를 들여왔다. 통신사가 의례였다면 왜관은 일상이었다.

오간 것은 물자만이 아니다. 통신사가 지나는 길목마다 일본 유학자들이 필담과 시문 창수를 청했고, 그 기록이 문집으로 남았다. 조선의 성리학 서적과 서예가 일본 학계에 흘러들었고, 반대로 1763년 통신사 정사 조엄은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들여와 조선의 구황 작물로 정착시켰다. 국가가 관리한 좁은 통로였지만 그 통로로 지나간 것은 결코 적지 않았다.

이 관계의 형식도 눈여겨볼 만하다. 조선은 청에 대해서는 사대(事大), 일본에 대해서는 교린(交隣)이라는 서로 다른 원리를 적용했다. 위계가 있는 관계와 대등한 관계를 동시에 운영한 것이다. 같은 시기 유럽이 베스트팔렌 이후 모든 주권 국가를 형식상 대등하게 놓는 단일 원리로 갔다면, 동아시아는 상대에 따라 원리를 달리하는 이중 체계를 유지했다. 이 차이는 훗날 19세기에 서구식 만국공법이 들어왔을 때 조선이 겪은 혼란의 배경이 된다.

그 평화가 끝난 방식

두 체제의 차이는 19세기에 드러났다. 1811년을 마지막으로 통신사는 재정 부담을 이유로 중단됐고, 그로부터 60년이 채 지나지 않아 두 나라의 관계는 무력에 의해 다시 규정된다. 1875년 운요호 사건과 1876년 강화도 조약이 그것이다. 200년간 유지된 평화는 서로를 이해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아서 유지된 측면이 있었고, 외부에서 새로운 힘이 들어오자 그 구조는 빠르게 무너졌다.

통신사를 미담으로만 기억하면 이 대목을 놓친다. 정확한 교훈은 이렇다. 평화는 선의로 유지되지 않고 구조로 유지된다. 조선과 일본의 260년은 양쪽 모두에게 전쟁이 비용만 크고 이득이 없는 구조였기에 가능했고, 그 구조가 외부 충격으로 바뀌자 평화도 함께 끝났다. 오늘의 평화가 무엇으로 떠받쳐지고 있는지 물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덧붙여, 이 260년을 "교류가 없던 시대"로 요약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통신사와 왜관은 국가가 허용한 범위 안에서 꾸준히 작동했고, 그 좁은 통로로 서적과 학문과 작물이 오갔다. 다만 그 교류가 국가 대 국가의 통제된 창구에 한정돼 있었기에, 민간의 상시적 왕래가 만들어내는 상호 이해의 축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19세기에 관계가 급변했을 때 양쪽이 서로를 거의 모르는 상태였던 것은 그 때문이다. 평화가 길었다는 사실과 서로를 알게 됐다는 사실은 별개다. 260년이라는 시간은 길었지만, 그 통로는 끝까지 좁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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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사실 관계는 위 자료를 따르며, 비교와 해석은 이 사이트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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