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 3·1운동과 세계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세계는 전쟁의 폐허 위에서 새 질서를 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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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과 함께 시작된 만세 운동은 전국 모든 계층이 참여한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으로 번졌다. 이 운동은 진공 속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 배경에는 불과 몇 달 전 끝난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쟁, 그리고 그 전쟁이 남긴 새로운 이념이 있었다.
총력전이 남긴 것, 민족자결주의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이어진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 열강이 두 진영으로 나뉘어 벌인 사상 최초의 총력전이었다. 참호전과 기관총, 독가스가 동원된 이 전쟁은 수천만 명의 사상자를 낳았고,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오스만 제국·러시아 제국 같은 오래된 다민족 제국들을 무너뜨렸다. 전쟁이 끝난 뒤 열린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은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다.
사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원래 패전국(독일·오스트리아 등)의 식민지·지배 지역에 적용하려던 원칙이었고, 승전국인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 직접 적용될 여지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 소식은 국외의 독립운동가들과 국내 지식인들에게 "지금이 독립을 세계에 호소할 기회"라는 희망을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1919년 1월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독살설이 돌 정도로 민심이 흉흉했다)이 기폭제가 되어, 이 두 흐름이 만나 3·1운동으로 폭발했다.
세계에 알린 독립 의지, 그리고 임시정부
3·1운동은 일본의 무력 진압으로 많은 희생자를 냈고,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 문제가 실제로 논의되지도 못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두 가지 뚜렷한 결과를 남겼다. 하나는 국내외에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 세력이 결집해 그해 4월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이 이른바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식민 통치 방식을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이다.
같은 시기 세계 곳곳에서도 비슷한 저항이 있었다. 인도에서는 간디가 비폭력 저항 운동을 조직화하기 시작했고, 중국에서는 파리강화회의의 산둥 반도 처리에 반발해 5·4운동이 일어났다(1919년 5월, 3·1운동으로부터 두 달 뒤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유럽 열강의 전쟁으로 시작됐지만, 그 여파가 식민지 민족들의 독립운동에 불을 지피는 세계사적 전환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3·1운동은 결코 한반도만의 고립된 사건이 아니었다.
이 비교가 말해주는 것
3·1운동이 세계사적 흐름과 맞닿아 있었다는 사실은 이 운동의 의미를 축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국제 정세라는 창을 통해 독립의 가능성을 포착하고, 전 민족이 조직적으로 결집해 세계에 목소리를 낸 그 기획력과 실행력이야말로 3·1운동을 특별하게 만드는 지점이다. 같은 시기 인도와 중국에서도 비슷한 저항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제1차 세계대전이 유럽만이 아니라 전 세계 식민지 질서를 뒤흔든 사건이었음을 보여준다.
3·1운동 이후 일본은 헌병 경찰을 앞세운 무단통치 대신 이른바 문화통치로 통치 방식을 바꿨지만, 이는 실질적 억압을 감추는 회유책에 가까웠다. 한편 윌슨이 내세운 민족자결주의도 얼마 지나지 않아 승전국들의 이해관계 앞에서 빛이 바랬다. 그럼에도 3·1운동이 촉발한 임시정부 수립과 조직적 독립운동의 전통은 이후 광복에 이르기까지 26년간 꾸준히 이어지는 저항의 뿌리가 되었다.
3·1운동 당시 낭독된 독립선언서는 일본에 대한 원한이 아니라 "평화의 사상가로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하겠다는 대의를 앞세운 점에서도 특별하다. 비폭력을 기조로 삼았던 이 운동의 정신은 이후 임시정부 헌법에도 반영되어, 대한민국이 처음부터 민주공화국을 지향하는 나라로 출발하는 밑거름이 됐다.
3·1운동은 이후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될 만큼,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치적 뿌리로 자리매김했다. 매년 3월 1일이 국경일로 기념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민족자결주의는 원래 우리를 향한 말이 아니었다
3·1운동을 설명할 때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늘 먼저 등장한다. 그런데 그 원칙의 실제 적용 범위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윌슨의 14개조에서 자결이 거론된 대상은 주로 패전국이 지배하던 땅, 곧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오스만 제국의 영역이었다. 일본은 승전국이었고, 따라서 조선은 애초에 그 원칙의 수혜자 목록에 없었다.
파리강화회의의 결정이 이를 증명한다. 회의는 조선 문제를 의제로 올리지 않았고, 오히려 독일이 가지고 있던 중국 산둥의 이권을 일본에 넘겼다. 그 소식이 전해진 1919년 5월 4일 베이징에서 학생들이 거리로 나섰다. 3·1운동과 5·4운동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사건이면서, 동시에 같은 배신에 대한 두 개의 반응이었다. 이 사이트에서 1919년 줄을 나란히 놓고 보면 한국사 항목과 세계사 항목이 사실상 하나의 사건임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3·1운동을 "국제 정세를 오판한 기대"로 낮춰 볼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조선의 지도자들이 기대한 것은 강대국의 선의가 아니라 발언권이 생기는 창이었다. 세계가 전후 질서를 다시 짜는 그 몇 달 동안만 식민지의 목소리가 기록될 수 있었고, 그 창이 닫히기 전에 목소리를 남기는 것이 목표였다. 실제로 그 기록은 남았고, 임시정부라는 형태로 26년을 이어갔다.
식민 통치의 인프라가 봉기를 실어 날랐다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어떻게 전국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날 수 있었는가다. 3월 1일 서울과 평양 등 여러 도시에서 같은 날 선언서가 낭독됐고, 이후 두 달간 시위는 전국 각지로 번졌다. 이 동시성을 가능하게 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일제가 깔아놓은 철도·우편·인쇄였다. 독립선언서는 보성사에서 2만여 부가 인쇄돼 철도편으로 전국에 배포됐고, 천도교·기독교·불교의 전국 조직망과 학생 조직이 그 배포망을 받았다.
식민 지배는 통치를 위해 표준화된 연결망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그 연결망은 지배자만 쓰는 것이 아니다. 인도의 간디가 전국적 비폭력 운동을 조직할 수 있었던 것도 영국이 놓은 철도와 영어라는 공통 언어 위에서였다. 제국은 저항이 전국 규모로 조직될 수 있는 조건을 함께 만든다. 1919년에 조선과 인도와 중국에서 비슷한 시기에 대규모 운동이 일어난 데에는, 같은 국제 정세만이 아니라 이런 공통된 물리적 조건도 있었다.
한눈에 보기
| 연도 | 한국사 | 세계사 |
|---|---|---|
| 1914~1918년 | — | 제1차 세계대전 |
| 1919년 1월 | 고종 승하 | 파리강화회의 개막 |
| 1919년 3월 | 3·1운동 | — |
| 1919년 4월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 — |
| 1919년 5월 | — | 중국 5·4운동 |
이어서 읽기
참고 자료
- 「기미독립선언서」(1919) 원문
- 윌슨의 14개조(1918) 및 파리강화회의 산둥 조항 — 자결 원칙의 적용 범위
- 조선총독부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 — 시위 발생지와 규모에 대한 통치 측 기록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문화통치 항목
사실 관계는 위 자료를 따르며, 비교와 해석은 이 사이트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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