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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 · 8세기의 유라시아

발해가 자리를 잡던 8세기, 유라시아는 반대쪽 끝에서도 새 질서를 세우고 있었다

대조영이 동모산에 나라를 세우던 무렵, 다마스쿠스에서는 왕조가 무너지고 있었다. 두 사건은 서로를 몰랐지만 같은 세기의 같은 조건 — 거대 제국이 흔들린 자리 — 위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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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와 세계사를 두 줄로 나란히 놓은 비교 연표 그래픽. 698년 대조영, 발해 건국, 732년 발해의 등주 공격, 750년 압바스 혁명, 우마이야 멸망 등의 연도를 짚는다.
이 글이 짚는 연도를 한국사·세계사 두 줄에 나란히 놓은 그림. 본문에 나오는 사건만 표시했습니다.

한국사 연표에서 698년은 조용한 해처럼 보인다.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 대조영이 동모산 기슭에 진(振)을 세운다. 713년 당으로부터 발해군왕 책봉을 받으며 국호가 발해로 굳는다. 같은 세기의 세계사 칸을 보면 훨씬 요란하다. 750년 압바스 혁명, 751년 탈라스 전투, 762년 바그다드 착공, 800년 카롤루스의 대관. 두 칸은 서로를 언급하지 않지만, 나란히 놓으면 같은 문장이 읽힌다. 8세기는 거대 제국이 한 번씩 흔들리고, 그 빈자리에서 새 질서가 선 세기였다.

빈자리에서 시작한 나라

발해의 출발은 제국의 실패에서 나왔다. 668년 고구려가 무너진 뒤 당은 안동도호부를 두어 옛 고구려 땅을 직접 다스리려 했지만, 요동의 통치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696년 거란의 이진충이 영주에서 봉기해 당의 동북 지배가 흔들린 틈에, 고구려 유민과 말갈 집단을 이끌던 대조영이 동쪽으로 이동해 나라를 세웠다. 제국이 강했다면 나올 수 없는 나라였고, 제국이 완전히 무너졌어도 나올 수 없는 나라였다. 흔들리되 아직 서 있는 제국의 가장자리가 발해의 자리였다.

그래서 발해의 외교는 처음부터 균형의 기술이었다. 무왕(재위 719~737)은 732년 장문휴를 보내 당의 등주(登州)를 공격했다. 당과 신라, 흑수말갈이 자신을 둘러싸는 형세를 힘으로 끊어 낸 것이다. 그러나 같은 왕이 727년에는 일본에 사신을 보내 국교를 열었다. 무력과 외교가 한 사람의 양손이었다. 뒤를 이은 문왕(재위 737~793)은 방향을 바꿔 당의 제도와 문물을 대거 받아들였다. 3성 6부의 중앙 관제를 갖추고 상경 용천부로 도읍을 옮겨 장안을 본뜬 도시를 지었다. 762년 당은 문왕의 작위를 발해군왕에서 발해국왕으로 올린다. 지방 정권 대우에서 하나의 나라 대우로 올라선 것이다.

9세기 선왕(재위 818~830) 대에 발해는 5경 15부 62주의 지방 제도를 완성하고 영토를 크게 넓혔다. 당에서 발해를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이 시기의 위상을 요약한다. 같은 시기 신라는 원성왕계와 무열왕계의 왕위 다툼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남북국이라는 표현은 이 두 나라가 한동안 대등한 무게로 존재했다는 사실 위에 서 있다.

같은 세기, 반대쪽 끝의 교체

발해가 체제를 다듬던 바로 그 수십 년 동안 유라시아의 서쪽에서도 주인이 바뀌었다. 750년, 아부 무슬림이 이끈 봉기가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리고 압바스 왕조가 들어섰다. 이 교체는 단순한 왕조 교체가 아니었다. 우마이야가 아랍인 중심의 지배였다면, 압바스는 페르시아계를 비롯한 비아랍 무슬림을 통치의 안쪽으로 끌어들였다. 762년 칼리파 만수르가 티그리스 강가에 새 수도 바그다드를 착공한 것은 그 방향 전환의 물리적 선언이었다. 중심이 지중해에서 내륙 아시아 쪽으로 옮겨 간 것이다.

751년의 탈라스 전투는 이 두 세계가 실제로 부딪친 드문 순간이다. 중앙아시아 탈라스 강가에서 당의 고선지가 이끈 군대가 압바스 측 연합군에 패했다. 전투 자체보다 결과가 길게 남았다. 이때 붙잡힌 당의 포로들을 통해 제지술이 이슬람 세계로 전해졌다는 것이 오래 이야기돼 온 설명이다. 사마르칸트에서 바그다드로, 다시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종이가 퍼지는 경로의 출발점이 여기로 지목된다. 다만 이 전승이 얼마나 단일한 계기였는지는 자료에 따라 평가가 갈리며, 중앙아시아에 이미 제지 기술이 존재했다는 견해도 있다.

당에게 탈라스는 서역 경영의 한계선이었지만, 진짜 타격은 4년 뒤 안에서 왔다. 755년 안녹산과 사사명이 일으킨 안사의 난이 8년을 끌면서 당의 중앙 권력은 회복되지 않았다. 절도사들이 사실상 독립적인 군벌이 되었고, 이 구조가 결국 907년 당의 멸망과 오대십국으로 이어진다. 발해가 당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도 끝내 흡수되지 않은 데에는, 받아들일 대상이던 제국 자체가 이 시기 이후 예전의 힘을 잃었다는 사정이 있다.

서쪽 끝에서도 새 왕관이 만들어졌다

더 서쪽에서는 또 다른 질서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카롤루스 마르텔이 이베리아를 거쳐 북상한 이슬람 세력의 진격을 막았고, 그의 손자 카를 대제(샤를마뉴)는 800년 성탄절에 로마에서 교황 레오 3세에게 황제 관을 받았다. 서로마 황제라는 칭호가 300여 년 만에 부활한 사건이다. 이 대관은 세속 권력이 종교 권위로부터 정통성을 받는 유럽 특유의 구조를 만들었고, 이후 천 년 동안 황제와 교황의 관계를 규정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발해의 문왕이 당에게서 국왕 책봉을 받은 762년과 카롤루스가 로마에서 관을 받은 800년은 형식이 비슷해 보인다. 둘 다 더 오래된 권위에게서 자기 지위를 인정받는 절차다. 그러나 방향이 반대였다. 동아시아의 책봉은 이미 존재하는 제국 질서 안에 자리를 얻는 일이었고, 카롤루스의 대관은 사라진 제국을 새로 불러내 그 자리에 서는 일이었다. 같은 세기에 유라시아 양 끝에서, 정통성을 조달하는 두 가지 방식이 각각 굳어졌다.

왜 발해는 기록이 적게 남았나

발해는 926년 거란(요)에 멸망했다. 문제는 그 뒤다. 고려는 발해 유민을 받아들였지만 발해의 역사를 자기 역사로 정리하지 않았고, 『삼국사기』에도 발해 본기는 없다. 발해가 남긴 자체 사서는 전하지 않으며, 우리가 아는 발해는 대부분 『구당서』·『신당서』 같은 중국 측 기록과 일본 측 외교 문서, 그리고 상경성 발굴 성과로 재구성된 것이다. 조선 후기 유득공이 『발해고』(1784)에서 신라와 발해를 함께 다루며 '남북국'이라는 틀을 제안한 것은, 그 공백을 뒤늦게 메우려는 시도였다.

이 기록의 비대칭은 연표를 읽을 때 조심할 지점을 하나 남긴다. 세계사 칸의 8세기가 촘촘하고 한국사 칸의 8세기가 성긴 것은 그 시대 한반도 북쪽에서 일어난 일이 적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적어 남긴 쪽이 적었기 때문이다. 연표의 빈칸은 사건의 부재가 아니라 기록의 부재일 때가 있다.

8세기를 한 줄로 읽으면

698년부터 800년까지 백 년을 한 줄에 놓으면, 서로 모르는 네 개의 사건이 같은 모양으로 보인다. 고구려가 사라진 자리에서 발해가 섰고, 우마이야가 무너진 자리에서 압바스가 섰고, 안사의 난이 뚫어 놓은 자리에서 절도사 체제가 섰고, 서로마가 비워 둔 자리에서 카롤루스의 제국이 섰다. 8세기 유라시아는 제국이 한 번씩 무너지고, 그 파편으로 다음 질서를 조립한 세기였다.

물론 이 유사성이 인과는 아니다. 발해와 압바스 사이에 직접적인 영향 관계를 말할 근거는 없다. 다만 같은 시기 여러 지역이 비슷한 구조적 국면을 통과했다는 사실은, 각 지역을 따로 볼 때는 보이지 않는다. 나란히 놓아야 보이는 것이 있다는 것이 이 연표의 전제다.

한눈에 보기

연도한국사세계사
698년대조영, 발해 건국
732년발해의 등주 공격투르-푸아티에 전투
750년압바스 혁명, 우마이야 멸망
751년탈라스 전투, 제지술 서전
755년안사의 난
762년문왕, 발해국왕 책봉바그다드 착공
800년카롤루스 대제 대관
926년발해 멸망

이어서 읽기

참고 자료

사실 관계는 위 자료를 따르며, 비교와 해석은 이 사이트의 것입니다.

이 시대의 다른 사건들도 연표에서 직접 비교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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