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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 기독교사 · 천주교 박해와 유럽

조선이 천주교를 박해할 때, 유럽은 이미 종교와 국가를 분리하고 있었다

조선이 새로 들어온 종교를 국법으로 억누르던 1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유럽은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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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와 세계사를 두 줄로 나란히 놓은 비교 연표 그래픽.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1784년 조선 천주교회 시작, 1791년 신해박해 등의 연도를 짚는다.
이 글이 짚는 연도를 한국사·세계사 두 줄에 나란히 놓은 그림. 본문에 나오는 사건만 표시했습니다.

18세기 말 조선에 전래된 천주교(가톨릭)는 이후 100년 가까이 국가의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다. 같은 시기 유럽은 이미 오랜 종교전쟁의 시대를 지나, 국가와 종교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해 가는 중이었다. 두 지역이 "종교와 권력"이라는 문제를 마주한 방식의 차이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거듭된 박해, 신유년에서 병인년까지

1801년 순조 즉위 직후, 노론 벽파는 정치적 반대 세력인 남인 시파를 천주교 신자로 몰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신유박해). 실학자 정약용 형제가 유배됐고, 조선 교회에 도움을 요청하려던 황사영이 쓴 백서가 발각되면서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이후로도 천주교는 조상 제사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유교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지며 산발적으로 탄압받았고, 1866년에는 병인박해로 정점을 찍었다. 이해 프랑스인 선교사와 조선인 신자 수천 명이 처형됐고, 이를 구실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공하는 병인양요까지 벌어졌다.

조선의 천주교 박해는 단순한 종교 탄압이 아니라, 성리학적 신분 질서와 조상 숭배를 국가 운영의 근간으로 삼았던 체제가 이질적인 세계관과 정면으로 충돌한 사건이었다. 천주교의 평등사상과 제사 거부는 양반 중심 신분제 사회의 기초를 흔드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유럽의 다른 길, 정교분리를 향해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 유럽은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가톨릭교회의 막대한 특권과 토지를 국가로 귀속시켰고, 1804년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나폴레옹 법전을 통해 종교의 자유와 세속적 법치를 명문화했다. 물론 유럽에서도 가톨릭과 개신교, 국가와 교회 사이의 긴장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지만, 큰 흐름은 "국가가 특정 종교를 강제하기보다 신앙의 자유를 점차 인정하는" 방향이었다.

같은 시기 유럽 열강은 오히려 선교와 통상을 앞세워 아시아로 팽창하고 있었다. 1840~1842년 아편전쟁으로 청의 문호를 강제로 연 것이 대표적이다. 조선의 병인양요(1866) 역시 이런 서구 열강의 동아시아 진출 흐름과 무관하지 않았다. 즉 조선의 천주교 박해는 대내적으로는 성리학 질서를 지키려는 몸부림이었지만, 대외적으로는 서구 열강의 팽창이라는 압력에 대한 방어적 반응 이기도 했다. 조선이 문을 걸어 잠그고 신앙과 사상을 통제하려 안간힘을 쓰는 사이, 유럽은 이미 그 문 앞까지 도달해 있었던 셈이다. 결국 조선은 병인양요·신미양요를 거치며 더욱 강경한 통상수교 거부 정책으로 기울었고, 이는 훗날 더 큰 격변을 뒤로 미루는 결과를 낳았다.

이 비교가 말해주는 것

조선의 천주교 박해와 유럽의 정교분리는 얼핏 정반대 방향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질문—국가는 종교(사상)를 어디까지 통제할 수 있는가—에 대한 서로 다른 시대의 답이었다. 유럽 역시 오랜 종교전쟁과 혁명을 거치고 나서야 그 답에 이르렀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선의 박해 역시 성리학 질서가 새로운 사상과 충돌하며 겪은 진통의 한 단계로 볼 수 있다. 이 진통은 개항(1876) 이후 조선이 본격적으로 근대 세계와 마주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조선의 종교 통제 정책은 결국 오래가지 못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한 뒤 서구 열강과 잇달아 통상조약을 맺으면서 선교의 자유도 사실상 허용되기 시작했고, 20세기 들어 대한민국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기본권으로 명문화했다. 한때 목숨을 걸어야 했던 신앙이 한 세기 남짓 만에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로 자리 잡은 변화는, 국가와 종교의 관계가 시대에 따라 얼마나 크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이들 중 다수는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에서 성인으로 시성되어 기려지고 있다. 박해의 기억이 한 세기를 훌쩍 넘어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으로 승화된 사례다.

선교사 없이 시작된 교회

조선 천주교회에는 세계 교회사에서 보기 드문 특징이 있다. 선교사가 오기 전에 신자가 먼저 생겼다는 것이다. 18세기 후반 남인 계열 지식인들은 베이징에서 들여온 한문 서학서를 읽고 스스로 교리를 받아들였고, 1784년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신앙 공동체를 꾸렸다. 성직자가 파견되어 개종시킨 것이 아니라, 책을 읽고 스스로 결론에 도달한 사람들이 교회를 만든 것이다.

이 출발 방식이 박해의 성격을 결정했다. 조정이 마주한 것은 외국 선교사의 침투가 아니라 내부 지식인의 이탈이었다. 유학을 공부하고 과거를 준비하던 사대부 자제들이 성리학의 세계관을 스스로 버리고 다른 체계를 택했다는 사실은, 국가에게 외교 문제가 아니라 통치 이념의 균열로 읽혔다. 박해 기록에 유독 사대부 집안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며, 조선의 박해가 그토록 집요하고 오래 이어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럽의 종교 탄압이 대체로 다른 집단을 향했다면, 조선의 박해는 지배층 내부를 향했다.

임계점은 제사였다

충돌이 폭발한 지점도 교리 논쟁이 아니라 제사였다. 1790년 베이징 주교가 조상 제사를 우상숭배로 규정해 금지하자, 이듬해 전라도 진산의 윤지충이 어머니 상에 신주를 불태우는 사건이 일어났다(신해박해). 성리학 국가에서 제사 거부는 개인의 신앙 선택이 아니었다. 그것은 효(孝)와 종법(宗法), 곧 사회 질서 전체의 근거를 부정하는 행위였다. 유럽의 종교개혁이 성사와 구원론을 두고 갈렸다면, 조선의 충돌은 조상을 어떻게 대하느냐에서 갈렸다.

긴 아이러니는 그다음이다. 1939년 교황청은 조상 제사를 종교 의례가 아닌 공경의 표현으로 인정해 허용했다. 150년 동안 수천 명의 목숨을 가른 그 금지가 신학적 필연이 아니라 해석의 문제였음이 뒤늦게 드러난 것이다. 윤지충이 신주를 불태운 지 148년 만에, 그가 지키려 한 원칙 자체가 교회의 손으로 거두어진 셈이다. 한 문화의 관습을 우상숭배로 볼 것인가 예절로 볼 것인가—그 판단 하나가 역사의 방향을 바꿨다. 사상이 충돌할 때 실제로 다투는 대상은 교리 자체가 아니라, 그 교리를 낯선 문화에 옮길 때의 번역인 경우가 많다. 조선의 박해사는 그 번역이 실패했을 때 치르는 대가를 기록한 문서이기도 하다.

한눈에 보기

연도한국사세계사
1789년프랑스 혁명
1801년신유박해
1804년나폴레옹 황제 즉위, 나폴레옹 법전
1840~1842년아편전쟁
1866년병인박해, 병인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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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사실 관계는 위 자료를 따르며, 비교와 해석은 이 사이트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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