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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 기독교사 · 예수 시대의 세계

예수가 태어난 그 시대, 로마는 평화를 누리고 한반도는 삼국의 여명기였다

베들레헴에서 아기가 태어나던 그때, 로마는 제국의 틀을 다졌고 한반도의 세 나라는 아직 어린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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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와 세계사를 두 줄로 나란히 놓은 비교 연표 그래픽. 기원전 57년 신라 건국(『삼국사기』), 기원전 37년 고구려 건국,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 로마 제정 개막 등의 연도를 짚는다.
이 글이 짚는 연도를 한국사·세계사 두 줄에 나란히 놓은 그림. 본문에 나오는 사건만 표시했습니다.

기독교의 출발점인 예수의 탄생은 흔히 종교적 사건으로만 다뤄지지만, 세계사와 한국사의 좌표 위에 놓아보면 흥미로운 동시대성이 드러난다. 예수가 태어나 활동하던 그 몇십 년은, 로마가 제국의 틀을 완성해 가던 시기이자 한반도에서는 삼국이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시기였다.

로마의 지배 아래, 유대 땅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가 태어나기 훨씬 전인 기원전 63년,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유대 지역은 로마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로마는 헤롯을 유대의 왕으로 세워 간접 통치했는데, 복음서는 예수가 이 헤롯 대왕의 재위 말기—헤롯이 기원전 4년에 죽었으므로 대체로 기원전 6~4년경—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흥미롭게도 오늘날 전 세계가 쓰는 서기(기원) 연호는 6세기의 수도사가 예수의 탄생 연도를 계산하며 만든 것인데, 정작 계산에 오차가 있어 "기원전에 예수가 태어났다"는 것처럼 보이는 역설이 생겼다.

예수가 태어난 시점은 로마가 아우구스투스(기원전 27년 즉위) 치하에서 "팍스 로마나"라 불리는 평화와 번영을 누리던 시기와 겹친다. 로마 제국의 안정된 통치와 잘 정비된 도로망은 훗날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지중해 전역으로 빠르게 전파하는 데 뜻하지 않은 토대가 되었다.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한 기원후 27~29년경과 십자가 처형을 당한 30년경 역시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은 티베리우스 황제 치하, 로마의 평화가 계속되던 시기였다.

같은 시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한반도의 나라들

예수가 태어나기 불과 반세기 남짓 전인 기원전 57년 신라가, 기원전 37년 고구려가, 기원전 18년 백제가 각각 세워졌다. 즉 예수가 활동하던 시기의 한반도 삼국은 이제 막 나라의 꼴을 갖추기 시작한 "신생국"이었다. 로마가 이미 지중해 전역을 아우르는 성숙한 제국으로서 평화를 누리고 있을 때, 삼국은 아직 주변 소국들을 통합해가는 초기 성장 단계에 있었던 셈이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 이후, 그의 제자들이 세운 초대 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30년경)을 시작으로 로마 제국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러나 이 신앙이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전해지기까지는 이후로도 1000년 넘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것이 313년(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인데, 그 시점의 한반도는 여전히 삼국이 서로 경쟁하던 시대였다. 지중해와 한반도라는 두 지역이 각자의 시간표 위에서 얼마나 다른 속도로 역사를 써 내려갔는지, 예수의 시대는 그 출발점을 보여준다.

이 비교가 말해주는 것

예수의 시대를 세계사·한국사와 나란히 놓아보면, 신앙의 역사도 결국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 위에서 펼쳐진 인간의 역사라는 사실이 새삼 드러난다. 로마라는 거대한 제국의 안정된 질서가 있었기에 새로운 사상이 지중해 전역으로 퍼질 수 있었듯, 모든 사상과 신앙의 확산에는 그것을 실어 나르는 시대적 조건이 함께 작용한다. 아직 신생국이던 한반도의 삼국에 이 신앙이 닿기까지 다시 수백 년이 더 필요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독교가 한반도에 실제로 뿌리내리기까지는 예수의 시대로부터 무려 1700년 넘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18세기 후반 조선의 실학자들이 베이징에서 한역 서학서를 접하며 천주교를 스스로 받아들인 것이 그 시작이었다. 로마 제국이라는 거대한 통로를 통해 지중해 세계로 빠르게 퍼진 신앙이, 정작 지리적으로 훨씬 가까운 동아시아에는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닿았다는 사실은 문명 간 교류의 통로가 지리적 거리만으로 결정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예수 시대 유대 지역은 로마의 속주였지만 동시에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아람어가 뒤섞인 다문화· 다언어 사회였다. 이런 복합적 환경 역시 새로운 사상이 태동하기에 유리한 토양이 되었다.

신앙은 왜 서쪽으로 먼저 갔나

예루살렘에서 보면 로마도 서쪽이고 페르시아도 동쪽으로 비슷한 거리에 있었다. 그런데 초대 교회는 압도적으로 서쪽으로 뻗었다. 이유는 신학이 아니라 인프라였다. 로마의 포장도로와 지중해 항로는 사람과 편지를 값싸게 실어 날랐고, 알렉산드로스 이후 지중해 동부에 깔린 코이네 그리스어라는 공용어가 있었다. 신약이 히브리어나 아람어가 아니라 그리스어로 기록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바울의 서신이 소아시아와 그리스의 도시들을 잇는 순간, 그 편지는 이미 제국이 깔아둔 길 위를 달리고 있었다.

동쪽은 사정이 달랐다. 로마와 적대하던 파르티아가 길목을 쥐고 있었고, 오아시스 도시마다 언어가 바뀌었으며, 교역로는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 오가는 데 최적화돼 있었다. 같은 거리라도 비용이 전혀 달랐다는 뜻이다. 사상의 확산 속도를 결정한 것은 사상의 매력만이 아니라, 그것을 실어 나르는 길과 그 길에서 통하는 언어였다.

한반도에 가장 가까이 왔던 순간

그렇다고 기독교가 동아시아에 늦게만 온 것은 아니다. 635년, 시리아 출신 선교사 아라본(阿羅本)이 당나라 장안에 도착해 태종의 허락을 받고 교회를 세웠다. 동방교회 계열의 이 신앙을 당에서는 경교(景敎)라 불렀고, 781년에 세워진 「대진경교유행중국비」가 그 200년의 활동을 증언한다. 예수의 시대로부터 600년 만에 기독교가 이미 동아시아의 수도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연표를 나란히 놓으면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635년이면 신라가 당과 손잡고 삼국통일로 나아가던 바로 그 시기이고, 신라의 유학생과 승려들이 장안에 상주하던 때다. 한반도 사람들이 경교의 존재를 몰랐을 가능성은 오히려 낮다. 그럼에도 이 신앙이 한반도에 뿌리내리지 못한 것은 통로가 없어서가 아니라, 당에서도 경교가 끝내 소수 외래 종교에 머물렀고 845년 회창폐불로 함께 정리됐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의 실학자들이 18세기 후반 베이징에서 한역 서학서를 통해 천주교를 스스로 찾아 받아들이기까지 다시 900년이 필요했다. 전파는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쪽의 필요와 조건의 문제라는 것을, 이 900년의 공백이 보여준다.

한눈에 보기

연도기독교사세계사한국사
기원전 63년로마의 유대 지배 시작
기원전 57~18년신라·고구려·백제 건국
기원전 27년로마 제국 성립 (아우구스투스)
기원전 6~4년경예수의 탄생
30년경십자가 처형과 부활, 오순절

이어서 읽기

참고 자료

사실 관계는 위 자료를 따르며, 비교와 해석은 이 사이트의 것입니다.

이 시대의 다른 사건들도 연표에서 직접 비교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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