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 종교개혁과 조선
루터가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길 때, 조선의 조광조는 개혁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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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년과 1519년. 두 해 사이 유럽과 조선에서는 각각 기득권에 맞선 개혁이 시작됐다. 하나는 성공해 유럽의 지도를 다시 그렸고, 다른 하나는 실패해 개혁을 이끈 사람의 죽음으로 끝났다. 루터의 종교개혁과 조광조의 개혁이다.
면벌부에 맞선 신학자, 훈구파에 맞선 사림
1517년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루터는 교회가 돈을 받고 죄를 사해준다는 면벌부 판매를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내걸었다. 마침 인쇄술이 보급되던 시기라 이 글은 순식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곧 가톨릭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거대한 종교개혁 운동으로 번졌다. 유럽은 이후 수백 년간 가톨릭과 개신교로 나뉘어 대립하게 된다.
비슷한 시기 조선에서도 개혁의 움직임이 있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나고 중종이 즉위한 뒤,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 세력이 급진적 개혁에 나섰다. 천거로 인재를 뽑는 현량과를 실시하고, 공신들의 부당한 공훈을 삭제하려 했으며, 향약을 보급해 성리학적 이상 사회를 만들려 했다. 훈구 세력의 기득권을 정면으로 겨눈 개혁이었다.
하나는 시대를 바꾸고, 하나는 사화로 꺾이다
두 개혁의 운명은 극적으로 갈렸다. 루터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로부터 파문당하고 이단으로 몰렸지만, 제후들의 보호와 대중의 지지를 얻어 살아남았다. 그의 사상은 인쇄된 팸플릿을 타고 유럽 전역에 퍼졌고, 결국 로마 교회의 독점적 권위를 무너뜨리는 근대의 문을 열었다.
반면 조광조의 개혁은 1519년, 시작한 지 불과 몇 년 만에 급제동이 걸렸다. 급진적인 개혁에 위기를 느낀 훈구파는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나뭇잎에 새겨 조광조가 왕이 되려 한다는 모함을 꾸몄다는 이야기가 전할 만큼, 중종의 마음을 조광조에게서 돌려세웠다. 결국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이 대거 숙청됐고, 조광조 자신은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같은 시기에 시작된 두 개혁이 이토록 다른 결말을 맞은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인쇄술을 통한 대중적 확산 여부, 지지 기반의 조직력, 개혁을 뒷받침할 세력의 존재 여부가 갈랐다고 볼 수 있다. 루터의 개혁은 이후 유럽 곳곳에서 종교전쟁으로 이어졌고, 조광조의 못다 이룬 개혁은 훗날 사림이 다시 중앙 정치에 진출하는 16세기 후반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이 비교가 말해주는 것
두 개혁의 성패를 가른 결정적 차이는 "확산의 도구"에 있었다. 루터의 주장은 갓 보급되기 시작한 인쇄술을 타고 몇 주 만에 유럽 전역의 대중에게 퍼졌지만, 조광조의 개혁은 조정과 사림 내부라는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새로운 사상이 살아남으려면 옳은 주장만이 아니라 그것을 실어 나를 매체와 지지 기반이 함께 필요하다는 사실을, 같은 시대에 갈린 두 개혁가의 운명이 보여준다.
조광조가 못다 이룬 사림의 이상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16세기 후반 선조 때에 이르러 사림 세력은 마침내 중앙 정치의 주류로 자리 잡았고, 이후 붕당 정치라는 새로운 형태로 조선 정치를 오랫동안 이끌었다. 유럽에서도 종교개혁의 여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아, 17세기 초에는 신·구교 갈등이 30년 전쟁이라는 유럽 최대 규모의 종교전쟁으로 폭발하게 된다.
루터의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또 다른 배경은 신성로마제국이 수백 개의 영방국가로 쪼개져 있어 황제의 통제력이 약했다는 점이다. 제후들은 각자의 이해에 따라 루터파를 보호하거나 탄압했고, 이 분권적 구조가 오히려 새로운 사상이 뿌리내릴 틈을 만들었다. 반대로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였던 조선에서는 왕의 마음이 돌아서는 순간 개혁 세력이 설 자리를 잃었다.
루터의 성경 독일어 번역은 종교개혁을 넘어 독일어라는 언어 자체를 표준화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조선에서도 훈민정음이 이미 15세기에 창제돼 있었지만, 16세기까지도 공식 문자로는 한문이 여전히 우세했다는 점에서 "자국어로 사상을 퍼뜨리는" 실험의 성패가 갈렸다고도 볼 수 있다.
나갈 문이 있었는가
확산 수단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루터에게는 나갈 문이 있었고 조광조에게는 없었다. 루터가 겨눈 것은 교회의 권위 자체였고, 그 권위를 부정하는 순간 그는 로마 바깥에 새로운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실제로 그는 그렇게 했다. 반면 조광조가 겨눈 것은 훈구 세력이었지 왕이 아니었다. 그의 개혁은 성리학적 이상 군주를 왕에게서 끌어내는 방식이었고, 따라서 왕이 등을 돌리는 순간 물러설 자리도 대안도 남지 않았다.
이 차이는 두 사람의 최후에 그대로 드러난다. 루터는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황제 앞에 서고도 살아남아 작센 선제후의 성으로 피신했다. 조광조에게는 피신할 다른 제후가 없었다. 조선은 왕이 유일한 정통성의 원천인 단일 체계였고, 신성로마제국은 수백 개의 권력이 경쟁하는 다중 체계였다. 개혁의 성패를 가른 것은 개혁가의 담대함이 아니라, 그가 밟고 선 정치 지형에 출구가 몇 개였는가였다.
성패는 언제 판정하는가
다만 "루터는 성공하고 조광조는 실패했다"는 요약은 판정 시점을 1520년대로 고정할 때만 성립한다. 시야를 100년으로 넓히면 그림이 달라진다. 조광조는 사약을 받았지만 그가 죽은 지 5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사림은 중앙 정치의 주류가 됐고, 1610년에는 문묘에 배향돼 조선 유학의 정통으로 공인됐다. 그의 개혁 의제였던 향약과 서원은 조선 후기 지방 질서의 뼈대가 된다. 패배한 것은 개인이었지 노선이 아니었다. 조선은 그를 죽인 뒤에 그의 주장을 채택한 셈이다.
반대로 루터의 승리에는 뒤늦게 청구서가 왔다. 종교개혁이 열어놓은 분열은 100년 뒤 30년 전쟁(1618~1648)으로 폭발해 독일 지역 인구의 상당 부분을 지웠다. 하나의 권위가 무너진 자리를 채운 것은 관용이 아니라 오랜 전쟁이었고, 그 전쟁이 끝나고서야 각 영방이 자기 종교를 정하는 체제가 자리 잡았다. 같은 시기 조선은 사화를 겪었지만 종교를 이유로 인구가 갈려 싸우지는 않았다. 어느 쪽이 성공인가라는 질문은, 무엇을 비용으로 계산에 넣느냐에 따라 답이 바뀐다.
한눈에 보기
| 연도 | 한국사 | 세계사 |
|---|---|---|
| 1506년 | 중종반정 | — |
| 1517년 | — | 루터의 종교개혁 (95개조 반박문) |
| 1519년 | 기묘사화 (조광조 제거) | — |
| 1524년 | — | 독일 농민전쟁 (종교개혁의 여파) |
이어서 읽기
참고 자료
- 『중종실록』 — 현량과·위훈삭제와 기묘사화 관련 기사
- 『정암집』(조광조 문집) 및 1610년 문묘 배향 기록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조광조와 기묘사화, 사림의 성장 항목
- 고등학교 세계사 교육과정 — 루터의 종교개혁, 보름스 제국의회, 30년 전쟁
사실 관계는 위 자료를 따르며, 비교와 해석은 이 사이트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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