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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 프랑스 혁명과 정조

프랑스가 혁명으로 왕정을 무너뜨릴 때, 조선의 정조는 탕평으로 개혁을 이끌었다

유럽이 왕정을 뒤엎는 혁명으로 향할 때, 조선은 왕이 직접 개혁을 이끄는 길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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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와 세계사를 두 줄로 나란히 놓은 비교 연표 그래픽. 1776년 정조 즉위·규장각 설치, 1789년 프랑스 혁명, 바스티유 습격, 1791년 신해통공 등의 연도를 짚는다.
이 글이 짚는 연도를 한국사·세계사 두 줄에 나란히 놓은 그림. 본문에 나오는 사건만 표시했습니다.

18세기 후반, 프랑스와 조선은 둘 다 "구체제의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비슷한 질문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두 나라가 택한 방식은 정반대였다. 하나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으로 왕정을 무너뜨렸고, 다른 하나는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왕권을 강화해 문제를 풀려 했다.

규장각의 정조, 개혁 군주의 길

1776년 즉위한 정조는 신하들의 세력 다툼(붕당)으로 왕권이 흔들리는 상황을 물려받았다. 그는 즉위와 동시에 왕실 도서관이자 학문·정책 연구 기관인 규장각을 설치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자 개혁의 싱크탱크로 삼았다. 초계문신제를 통해 젊고 유능한 관리를 직접 길러냈고, 어느 한쪽 붕당에 치우치지 않는 탕평책으로 정국을 안정시키려 했다. 수원 화성 축조 역시 이런 개혁 정치의 상징적 결과물이었다.

정조의 개혁은 "왕이 신하들보다 더 유능하고 공정해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신념에 바탕을 뒀다. 즉 문제는 왕정 자체가 아니라 왕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라 본 셈이다. 이 때문에 정조의 개혁은 체제 안에서의 개선에 머물렀고, 그가 1800년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자 개혁 동력도 함께 꺾였다.

바스티유의 함락, 체제 자체를 뒤엎다

같은 시기 프랑스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오랜 신분제(성직자·귀족·평민의 삼부회 체제)와 왕실의 방만한 재정이 쌓이고 쌓여 임계점에 다다른 프랑스에서, 1789년 파리 시민들은 전제 왕정의 상징이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다. 곧이어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인권선언)이 발표되며 "자유· 평등·국민주권"이라는 이념이 세상에 나왔다.

프랑스 혁명은 "왕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왕정 그 자체, 그리고 그 위의 신분제가 잘못됐다"고 진단했다는 점에서 정조의 개혁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 혁명은 이후 나폴레옹의 등장과 몰락을 거치며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국민주권과 근대 시민사회라는 이념만큼은 유럽 전역, 나아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정조가 세상을 떠난 지 정확히 100여 년 뒤, 조선 역시 갑오개혁과 독립협회 운동을 거치며 비슷한 질문—왕정을 어떻게 근대적 정치 체제로 바꿀 것인가—과 마주하게 된다.

이 비교가 말해주는 것

두 나라의 대비는 "개혁"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다른 스펙트럼을 가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정조의 개혁은 체제 안에서 왕권을 통해 문제를 풀려 한 점진적 접근이었고, 프랑스 혁명은 체제 자체를 갈아엎은 급진적 접근이었다. 흥미롭게도 정조 사후 조선의 개혁 동력이 약해진 반면, 프랑스는 나폴레옹의 등장과 몰락이라는 혼란을 거치고도 혁명의 이념만큼은 끝내 되돌리지 못했다는 차이가 있다.

프랑스 혁명의 이념은 나폴레옹의 정복 전쟁을 통해 역설적으로 유럽 전역에 퍼져, 19세기 내내 각국 자유주의·민족주의 운동의 밑거름이 됐다. 조선에서도 정조 사후 세도정치로 개혁 동력이 크게 후퇴했지만, 약 100년 뒤인 1894년 갑오개혁에 이르러서야 신분제 폐지 같은 근대적 변화가 뒤늦게 시도된다. 위로부터의 점진적 개혁이 왕의 죽음과 함께 쉽게 꺾일 수 있다는 사실을, 정조 이후 조선의 역사가 보여준다.

정조가 규장각을 통해 인재를 기르려 했다면,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은 그랑제콜 같은 교육기관으로 근대적 관료·군사 엘리트를 양성했다. 두 사례 모두 "유능한 인재 양성"을 국가 운영의 핵심으로 삼았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 인재들이 봉사하는 체제의 성격—세습 왕정이냐 혁명 이후의 제국이냐—은 전혀 달랐다는 점에서 같은 수단이 다른 목적에 쓰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정조가 죽은 뒤 조선은 순조·헌종·철종으로 이어지는 세도정치기에 접어들며 오히려 왕권이 약화되고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했다. 프랑스가 혁명 이후 우여곡절 끝에 공화정을 향해 나아간 것과 달리, 조선은 개혁 군주 한 사람의 퇴장과 함께 개혁의 흐름 자체가 끊기고 말았다.

왕은 왜 한쪽에선 개혁가이고 한쪽에선 표적이었나

같은 시기 두 왕이 정반대 자리에 섰다. 정조는 개혁의 주체였고 루이 16세는 개혁의 표적이었다. 이 차이를 인물의 역량으로 설명하기 전에 국고를 먼저 봐야 한다. 프랑스 혁명의 방아쇠는 이념이 아니라 파산이었다. 부르봉 왕실은 7년 전쟁에 이어 미국 독립전쟁까지 지원하면서 재정이 바닥났고, 세금을 더 걷으려면 면세 특권을 쥔 성직자·귀족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래서 1789년 175년 만에 삼부회를 소집했고, 그 회의장이 그대로 혁명의 발화점이 됐다.

정조에게는 그런 청구서가 없었다. 18세기 조선은 대외 전쟁을 치르지 않았고, 대동법과 균역법으로 조세 체계도 정리돼 있었다. 왕이 돈을 구걸하러 신분 대표들을 부를 이유가 없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정조는 규장각과 장용영을 세워 위에서 아래로 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 요컨대 혁명은 왕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왕이 파산해서 시작되고, 조선의 개혁이 왕의 손에 남아 있었던 것은 조선 왕실이 파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연도에 놓인 두 사건의 성격이 이토록 갈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도는 사람보다 오래 사는가

두 개혁의 진짜 시험대는 주역이 사라진 뒤였다. 1800년 정조가 죽자 그가 만든 것들은 빠르게 지워졌다. 친위 부대 장용영은 1802년에 혁파됐고, 규장각은 남았으나 개혁의 사령탑이 아니라 도서 기관으로 축소됐다. 개혁의 도구들이 왕 개인의 권력에 묶여 있었기에, 그 사람이 사라지자 함께 사라진 것이다. 개혁 기구가 아니라 개혁 군주가 있었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하다.

프랑스에서는 정반대가 벌어졌다. 나폴레옹은 1815년에 몰락했고 부르봉 왕가가 돌아왔지만, 나폴레옹 법전과 도량형 미터법, 데파르트망 행정 구역은 그대로 남았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왕정복고 정부조차 이것들을 되돌리지 못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들은 특정한 통치자에게 충성하는 조직이 아니라 누가 통치하든 필요한 기반이었기 때문이다. 정조의 좌절이 일러주는 것은 개혁가의 수명이 짧다는 사실이 아니라, 개혁을 사람에게 묶어두면 그 사람의 수명이 곧 개혁의 수명이 된다는 사실이다.

한눈에 보기

연도한국사세계사
1765년경산업혁명 시작 (영국)
1776년정조 즉위, 규장각 설치
1789년프랑스 혁명 (인권선언)
1796년백련교의 난 (청 쇠퇴 조짐)
1799년나폴레옹 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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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사실 관계는 위 자료를 따르며, 비교와 해석은 이 사이트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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