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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 삼국시대와 로마

삼국이 나라의 기틀을 다질 때, 로마는 황제의 시대를 열었다

기원전 57년부터 18년 사이, 한반도에서는 세 나라가 태어났고 로마에서는 한 사람이 황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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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와 세계사를 두 줄로 나란히 놓은 비교 연표 그래픽.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 로마 제정 개막, 194년 고구려 진대법, 260년 백제 16관등 제정 등의 연도를 짚는다.
이 글이 짚는 연도를 한국사·세계사 두 줄에 나란히 놓은 그림. 본문에 나오는 사건만 표시했습니다.

기원전 57년 신라, 기원전 37년 고구려, 기원전 18년 백제. 한반도 삼국은 약 40년 사이에 잇달아 나라의 문을 열었다. 흥미롭게도 거의 같은 시기, 지중해 저편의 로마는 정반대 방향의 변화를 겪고 있었다. 여러 사람이 나라를 나눠 세우던 한반도와 달리, 로마는 오랜 공화정을 접고 한 사람의 황제 아래로 모이고 있었다.

세 나라의 탄생과 한 제국의 재편

전승에 따르면 박혁거세가 경주 지역에 신라(사로국)를 세운 것이 기원전 57년, 주몽(동명성왕)이 부여에서 남하해 졸본에 고구려를 세운 것이 기원전 37년, 그의 아들뻘인 온조가 한강 유역에 백제(위례성)를 세운 것이 기원전 18년이다. 세 나라는 처음엔 여러 소국 중 하나에 불과했지만, 각자의 지리적 이점—신라는 방어에 유리한 분지, 고구려는 정복에 유리한 산악, 백제는 물자가 풍부한 한강 유역—을 살려 성장해 나갔다.

같은 시기 로마는 카이사르 암살(기원전 44년) 이후의 내전을 옥타비아누스가 수습하고 있었다. 기원전 27년,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라는 칭호를 바쳤다. 형식적으로는 공화정이 유지됐지만 실질적으로는 한 사람이 군대·재정·행정을 장악한 제정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이후 약 200년간 이어진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훗날 사람들은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라 불렀다.

확장하는 나라들, 팍스 로마나의 로마

삼국은 이후 수백 년에 걸쳐 서로 경쟁하며 국가 체제를 다졌다. 4세기 백제 근초고왕은 마한을 정복하고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했으며, 5세기 고구려 장수왕은 평양으로 천도해 남진 정책을 폈다. 6세기 신라 진흥왕은 한강 유역을 손에 넣고 순수비를 세웠다. 세 나라 모두 아직 하나로 통일되기 전, 각자의 전성기를 번갈아 맞으며 균형을 이루던 시기다.

로마는 96년부터 180년까지 다섯 명의 현명한 황제(5현제)가 다스린 최전성기를 맞았다. 이 시기 로마 제국의 영토는 브리튼 섬부터 메소포타미아까지 뻗어 있었고, 지중해는 사실상 "로마의 호수"였다. 삼국이 한반도라는 좁은 무대에서 치열하게 각축하던 그 시기, 로마는 지중해 전체를 아우르는 초강대국으로 군림하고 있었던 셈이다. 두 지역의 규모 차이는 크지만,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영토를 넓혀가는" 성장의 방향성만큼은 닮아 있다.

이 비교가 말해주는 것

이 시기를 나란히 보면 또 하나 흥미로운 우연이 있다. 로마가 476년 서로마의 멸망으로 고대의 막을 내릴 무렵, 한반도에서는 아직 삼국이 통일되지 않은 채 치열한 항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신라가 마침내 삼국통일을 완성한 것은 676년, 로마 멸망으로부터 정확히 200년 뒤였다. 하나의 제국이 저물고도 한참 뒤에야 다른 지역의 통일이 이뤄졌다는 사실은, 역사의 시계가 지역마다 전혀 다른 속도로 흘러간다는 점을 새삼 일깨운다.

로마가 남긴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유럽 법체계와 언어(라틴어에서 갈라진 로망스어군) 곳곳에 살아 있다. 삼국 역시 각자의 유산을 남겼다. 신라의 금관과 첨성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비, 백제의 미소를 띤 불상은 지금도 그 시대의 기술과 미의식을 증언한다. 규모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문명 모두 이후 수천 년을 관통하는 문화적 자산을 남겼다는 점은 다르지 않다.

삼국이 각축하던 시기 로마 역시 내부적으로는 평온하지만은 않았다. 3세기에는 군인 황제 시대라 불릴 만큼 잦은 황제 교체와 내전이 이어졌고, 이는 훗날 제국을 동서로 나누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화려한 전성기 이면에 자리한 이런 균열은, 거대한 제국도 내부의 통합을 끊임없이 관리해야 유지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왜 한쪽은 갈라지고 한쪽은 뭉쳤나

같은 시기에 한반도는 셋으로 나뉘고 로마는 하나로 뭉쳤다. 이 차이를 민족성이나 역량으로 설명하는 것은 손쉽지만 틀리다. 결정적인 것은 사람과 물자를 옮기는 비용이었다. 로마의 판도 한가운데에는 지중해가 있다. 고대의 배는 같은 무게를 육로의 수십 분의 일 비용으로 실어 날랐고, 그래서 로마는 이집트의 곡물로 로마 시민을 먹이고 브리튼의 군단에 급여를 보낼 수 있었다. 지중해는 제국을 가르는 장벽이 아니라 제국을 하나로 묶는 고속도로였다.

한반도의 지형은 정반대로 작동했다.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반도를 세로로 자르고, 그 사이 평야는 서로 떨어져 있다. 이런 곳에서는 정복은 가능해도 유지가 비싸다. 고구려가 남진하고 백제가 북진하고 신라가 한강을 빼앗는 일이 되풀이되면서도 어느 쪽도 반도를 오래 독점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삼국이 700년 가까이 병존한 것은 통일할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세 개로 나뉜 상태가 그 지형에서 가장 안정된 균형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삼국을 무너뜨린 힘은 반도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균형을 깬 것은 언제나 바깥에서 들어온 변수였고, 그래서 통일의 방식도 정복이 아니라 외교에 가까웠다.

같은 외부 압력, 정반대의 결말

더 흥미로운 것은 끝이다. 로마는 476년에 무너졌고 신라는 676년에 통일했는데, 두 사건의 배경에는 똑같이 강력한 외부 세력의 등장이 있었다. 로마에는 게르만족의 이동이, 한반도에는 중국을 다시 통일한 수·당의 압박이 닥쳤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로마는 그 압력에 눌려 조각났고, 신라는 그 압력을 지렛대로 삼아 당과 동맹해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무너뜨렸다.

차이를 만든 것은 압력의 크기가 아니라 압력에 대응할 선택지의 수였다. 로마의 국경 밖에는 협상 상대가 될 만한 조직된 국가가 없었다. 게르만 여러 부족은 흡수하거나 막아내는 대상이었지 손을 잡을 상대가 아니었다. 반면 한반도의 삼국에게 당은 위협인 동시에 거래 가능한 상대였고, 신라는 그 거래를 선택했다. 물론 대가는 컸다. 통일 직후 벌어진 나당전쟁(670~676)은 그 거래의 조건을 다시 협상하는 과정이었고, 신라는 대동강 이남을 지키는 선에서 매듭지어야 했다. 외부의 거인을 이용하는 전략에는 언제나 그만큼의 청구서가 따라온다.

한눈에 보기

시기한국사세계사
기원전 57년신라 건국 (박혁거세)
기원전 44년카이사르 암살, 로마 내전
기원전 37년고구려 건국 (주몽)
기원전 27년로마 제국 성립 (아우구스투스)
기원전 18년백제 건국 (온조)
96~180년삼국 각축 시대로마 전성기 (5현제, 팍스 로마나)

이어서 읽기

참고 자료

사실 관계는 위 자료를 따르며, 비교와 해석은 이 사이트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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